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무트 슈미트 (문단 편집) ==== 1980년 전후 동서독 핵우산 경쟁 ==== 한편 [[1972년]] 미·중 간의 교류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독은 동독과 군축협상에 들어갔는데, [[1976년]] 베트남 통일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하면서 다시 냉전의 기운이 유럽을 덮었다. 이때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에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지대지미사일을 배치했다. 이 탄도미사일은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 전체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고, 당시 유럽에는 이에 대항할 만한 동급의 핵무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유럽에서도 영국,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핵위협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직접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 국한되었다. 때문에 서독을 비롯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노리는 소련 핵위협에 맞설 핵우산으로 제공되지는 않았다.] 물론 소련이 실제로 [[서유럽]]에서 핵전쟁을 벌이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SS-20의 동독 배치가 당시에 가졌던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이는 유럽의 군사적 힘의 균형이 비대칭전력의 등장으로 사회주의 공산권으로 쏠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때쯤 갈수록 의석수를 늘리며 기염을 토해가고 있던 [[프랑스]], [[이탈리아]]의 공산당 세력, 서독 사민당 내의 좌파세력을 고무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당시 서독 사민당 좌파세력과 서독 운동권 학생들은 SS-20의 동독 배치를 환영하며 이를 정당화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소련이 펼친 정당화 논의에 적극 찬동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소련에 대한 미국의 외교협상을 믿어볼 수도 있었지만, [[1970년대]] [[데탕트]] 시기 미소가 추진했던 전략무기 제한협정 등의 핵무기 군축은 주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처럼 미국과 소련 영토를 직접 공격할 정도의 장거리 무기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SS-20과 같은 중거리 핵전력은 소련이 미국과의 군축협상에 영향 받지 않고, 서유럽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련의 도발에 대해 미국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난감해 하고만 있었는데,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직접 이러한 도발에 맞서기 위한 [[NATO]] 차원의 대응전력 배치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며 미국에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1977년 9월 그 유명한 '런던 연설'을 통하여 소련이 동독에서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키지 않을 경우,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회원국인 서독 역시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MGM-31 퍼싱|퍼싱-2]]를 자국에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물론 소련이 동독에서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킨다면 퍼싱-2의 서독 배치도 필요 없는 것이었고, 서독정부는 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어쨌든 이로써 SS-20 미사일에 관한 외교적 협상의 주도권은 미국-소련에서 서독-소련으로 넘어왔으며, 미국과 소련이 진행하던 중거리핵전력협정(INF)과 관련한 협상은 중단되었다. 물론 서독에서는 퍼싱-2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소련-동독이 설마 핵전쟁을 일으키겠냐?' '미제국주의 호전광의 꼭두각시가 되겠다는 거냐?' '어차피 우리가 대응하지 않아도 걔네는 그냥 철수시킬 거다' 등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심지어 일부 [[사회주의]] 계열 운동권 학생들은 헬무트 슈미트의 암살을 공공연히 협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슈미트 정권은 이러한 결정이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SS-20 미사일을 철수시키라는 서독의 요구에 소련은 응하지 않았고, 그 결과 1984년 서독에는 퍼싱-2 미사일이 결국 배치되고 말았다.[* 1983년 11월 기민련과 자민당의 찬성으로 퍼싱-2 미사일 배치가 의결되었다. 퍼싱-2 미사일의 배치는 본디 헬무트 슈미트의 아이디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은 이때의 표결에서 퍼싱-2 미사일의 배치에 반대하였다.] 그런데 이때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대소련 강경 노선이 펼쳐지고, 미국의 본격적인 군비증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유럽 내에는 반전, 반핵 여론이 불 붙기 시작하였다.[* 1983년 11월 헬무트 슈미트의 고향인 [[함부르크]]에서만 무려 40만 명의 인파가 모여 퍼싱-2의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물론 이러한 시위와는 별개로 서독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퍼싱-2의 배치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결국 고르바초프 시절인 1980년대 후반에야 미소는 SS-20, 퍼싱-2를 함께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 참고로 이 핵우산 배치 경쟁의 경우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 초판 서독과 동독 파트에서 이 내용이 제법 언급된 적이 있으나, 냉전 종식 이후 개정된 부분에서는 빼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